[세상 읽기] 차한식 88서울올림픽 국가대표, 현 위앤위드(we&with) 봉사단장
[CEO저널=이주형 기자] 88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중대한 사건이다. 대한민국의 번영을 세상에 알리는 기회였고, 냉전시대의 종식이 가까워졌음을 피부로 느낀 시간이었다. 이때 42.195㎞를 묵묵히 달리며 자신의 신념을 몸으로 전달한 사내가 있었다. CEO저널에서는 차한식 88서울올림픽 국가대표 선수였던, 전 마라톤 감독과 대화하며 당시를 회상하고자 한다
Q. 감독님 소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저는 88서울올림픽 국가대표 선수 출신이고요. 트라이애슬론 국가대표팀 코치를 역임했고 운동 지도를 한 30년 해왔습니다.
지금은 ‘위앤위드(we&with)’라는 봉사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봉사단에서는 기부 모금 활동 및 스포츠 행사를 통해 봉사하고 대회를 진행해서 모은 금액으로 기부하는 기획을 하고 있습니다.
Q. 감독님께서 88서울올림픽에서 국가대표로 출전하셨는데 어떻게 육상이라는 종목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운동을 했어요. 보통 엘리트 선수들 입문이 초등학교 3학년이에요. 그때 탁구를 했어요. 3, 4학년 때 탁구를 하고 5학년 때부터 배드민턴으로 전향했죠. 그다음에 축구 클럽에서 축구를 했어요. 당시 축구가 엄청나게 인기가 있어서 각 학교마다 축구클럽이 엄청 많았습니다. 당시 다들 축구를 하고 주변 다른 학교 클럽들과 친선게임을 주말마다 하곤 했었습니다. 그때 주변에서 나를 보던 코치들이 나름 경쟁력이 있다고 본 건지 문일고등학교 축구부에서 축구할 수 있도록 주선을 했습니다. 실제로 축구로 입학하려 했어요. 문일고등학교가 축구로 유명했거든요. 저는 축구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남다른 주력이 있어서 내가 치고 달리면 다들 따라오지 못하니까 주력에 대한 타고난 기질이 있었죠.
그러나 저는 배드민턴 선수였으니 축구는 취미로 하는 것이지요. 배드민턴으로는 서울시 대표까지 뽑혔을 정도로 나름대로 유망주였습니다. 그리고 옛날에는 서울시 교육감배, 서울시장배 육상대회가 많았어요. 당시에는 각 학교마다 의무적으로 다 대회를 나가야 했죠.
학교에서 무조건 차출해서 나가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육상부가 없으니까 배드민턴부 중에서 저보고 나가라고 그랬죠. 그래서 생각 없이 육상 대회를 참가했는데 덜컥 3,000미터에서 입상을 한 거예요. 서울시교육감배 그다음에 서울시장배 대회 두 개 대회 나갔는데 1등은 못 했어요. 둘 다 3천 미터로 뛰었는데 한 번은 2등 하고 한 번은 3등 했습니다.
당시에 체육 선생님이 학교에서 감독을 하셨어요. 그다음에 코치가 따로 있죠. 3학년 하반기 특기자 원서를 작성하기 전에 체육 선생님이 필드하키 국가대표 출신이었는데 감독님이 어느 날 저를 부르시더니 배드민턴은 비인기 종목이어서 아무리 날고 기어도 밥 벌어먹기 힘들다, 육상으로 가라 하셨어요. 사실 그때만 해도 배드민턴은 국가대표 돼도 실업팀도 별로 없고 육상은 마라톤팀이 한 20개도 넘었어요.
마라톤 대회를 하면 TV에서 무조건 중게방송을 할 정도로 인기였으니까요. 그런데 운이 좋게도 육상부가 있는 숭문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목포에서 국회의사당까지 6박 7일 동안 달리는 경호 역전 마라톤 경기를 하는데 서울시 대표를 15명으로 뽑아요. 선발전에는 중학생, 고등학생 모두 10km 경기를 합니다. 이 경기에서 제가 13등을 하게 돼서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울시 대표가 되었습니다. 배드민턴을 하다고 갖 고등학교에 왔는데 며칠 운동 안 하고 서울시 대표로 덜컥 선발된 거예요.
또 그해 6월에 10월의 전국체전 서울시 대표 선발전이 있었는데 단 세 명을 뽑아요. 그런데 제가 또 운이 좋게도 2~ 3학년 선배들을 제치고 3등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3월에 서울시 대표가 되었고 또 3개월 만에 전국 체전에 선발된 겁니다. 운이 좋았죠.
그런데 더 운이 좋았던 건 뭔가 하면 경부역전 마라톤이라고 부산에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수백㎞를 달리는 경기가 있었어요. 부산에서 서울까지 500km를 역전 경기로 달리는 경기죠.
이 대회는 국가대표 및 대학, 실업팀까지 모두 참가하는 대회입니다. 고등학교 대학 실업 일반인 다 포함해서 열다섯 명을 뽑아요. 그러면 각 시, 도에서 열다섯 명의 시나 도를 대표하는 대표 선수가 선발되는데 여기에도 선발되었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울시 대표 선수로 뽑혔어요. 이런 운도 없을 거예요. 그것도 갖 고등학교 1학년이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제치고 경부역전 서울시 대표로 선발된다는 것은 정말 하늘에 별따기라고 할 만큼 어려운 것이거든요.
그렇게 고등학교를 3년 나름 열심히 운동하였는데 마지막 통일역전 마라톤 경기에서 우수선수상을 수상하면서 전국 랭킹 5위로 졸업했어요. 그리고 대학을 가고 대구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하던 중 88년 초에 올림픽 대표선수 선발전을 하게 되는데 이 대회에서 입상하게 되어 3천 m 장애물 달리기 88서울올림픽 대표선수로 제가 단 한 명으로 선발되었습니다
Q. 88서울올림픽 때 준비 과정에서 어떤 에피소드가 있는지?
A.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영웅인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 난 뒤 인터뷰에서 달리는 차에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너무 힘든 훈련을 하였다고 했는데 마라톤 선수들이라면 이 말을 모두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겁니다. 정말.
모든 장거리, 마라톤 선수들은 정말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로 훈련이 고되고 힘들어요. 정말 그 정도로 쉬운 게 아니에요. 전지훈련을 가면 장거리 훈련으로 길게는 65km까지도 달리는데 한 번에 제주시에서 출발해서 서귀포시까지 달리는 거죠. 한 이 정도 3시간 반 4시간~5시간까지도 이렇게 달리는 거지요.
올림픽 전에 육상대표 선수들이 강심장 및 정신력 강화를 위해 철원에 있는 공수 특전 부대에 가서 공수 부대원만 훈련하는 레펠 훈련도 받았죠. 500m 줄 타고 쫙 내려오는 외줄 도하 이런 훈련도 했어요. 지도자나 선수나 오로지 조금이라도 더 잘 달리려고 하는 마음뿐이었으니 뭔들 못했겠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웃음만 나와요. 그땐 어쩌면 무모했었지만 나름 정신력을 키우기 위한 방편으로는 대단했죠.
저는 운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국가대표가 꿈이었어요. 오직 국가대표만 돼야 되겠다는 꿈을 꿨어요. 그런데 좀 일찍 은퇴를 했어요. 왜 은퇴했냐면 내 목표를 이루고 나니까 더 이상 올라갈 목표가 없더라고요.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죠. 올림픽 끝나고 3년 있다가 28세에 은퇴했습니다.
제 어릴 적 꿈이 세계 최고 선수가 되겠다는 꿈이었더라면 아마 더 오래 더 좋은 성적으로 운동을 했겠지요. 올림픽에서 메달을 땄을 수도 있겠죠. 물론 제 가정이지만요. 하하하
두 번째는 제가 마라톤에서 우승이 없어요. 다른 종목은 우승해 봤는데 마라톤은 우승을 못 해봤어요. 가장 아쉬운 점은 마라톤 우승을 못 해본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후학을 키우는 게 저의 마지막 꿈입니다. 제가 제자를 키우고 싶은 이유가 내가 못한 일을 내 제자를 통해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국가대표가 아니라도 국제대회에 나갈 수 있어요. 옛날처럼 팀에서 국가대표가 돼서 나가는 게 아니라, 얼마든지 국가대표가 아니라도 팀이나 개인적으로 외국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 있어요. 좋은 선수를 양성해서 국제대회에서 성적을 거두면 자연 국가대표는 될 수 있겠지요. 물론 국내대회에도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되겠지요.
그런데 지금은 참 쉽지 않습니다. 옛날과 달리 지금은 마라톤이 비인기 종목이고 반대로 배드민턴은 인기 종목이 되었어요.
저는 배드민턴 지도자 자격증도 있어요. 물론 육상지도자 자격증도 있지요. 배드민턴 지도자 자격증을 따러 서울대에서 시험을 보는데 감독관이 들어오시는 그 순간 “차한식” 제 이름을 부르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선생님, 저는 선생님 기억 못 합니다. 그런데 저를 어떻게 기억하세요” 그랬더니 본인 이름을 알려주셨어요. 알고 보니 제가 중학교 배드민턴 선수 시절 경리단 감독님이셨고 서울시 대표팀 감독을 겸임하고 계시던 분이었어요.
제가 서울시 대표 선수로 선발될 때 쭈욱 저를 지켜보며 저의 경기를 인상 깊게 보셨고 저를 지도하면 분명 좋은 선수가 될 것으로 예상했었는데 제가 육상으로 진로를 바꾸게 되어 무척 아쉬운 상태로 20~30년이 흘러, 자격증 시험을 보러 가서 만나게 된 겁니다. 그때까지 저의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던 거지요.
배드민턴은 공격 운동이에요. 상대 코트에 셔틀콕을 빨리 떨어트리는 운동이죠. 근데 저는 그러니까 고집이 좀 있었어요. 어떤 고집이 있냐 하면 제가 선발전 할 때도 스매싱을 단 한 번을 안 했어요. 수비만 주구장창 했었어요. 그러고도 서울시 대표를 7명 뽑는데 제가 그중에서 4등을 했어요.
상대방이 실수할 때까지 수비를 했죠. 그 정도로 수비를 했는데 이렇게 하는 선수를 한 번도 보시지 않았던 거죠. 하지만 결국 나이가 오버 되어 서울시 대표로 참가하지 못했지요. 아마도 이것 때문에 제가 육상 선수로 가게 된 것일 수도 있겠죠. 그래서 제가 배드민턴을 안 하고 육상으로 간 것이 아쉬웠다고 하셨어요.
Q.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운동은 타고나는 게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요?
A. 단거리는 타고나는 것이지만 장거리는 안 그래요. 물론 선천적인 것도 있어야 되지만 후천적인 게 더 많아요. 심폐 지구력이라든지 근지구력은 훈련과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흔히 뭐 헬스장에서 기구를 들면서 몸 만든다는 것처럼 장거리는 만들어지는 거거든요. 근육의 모양은 보기 좋게 만드는 것처럼 마라톤 실력도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서 세계적인 선수로 도약할 수 있는 거지요.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선수 자신이 우승하고자 하는 강한 정신력이 있어야 하는 거죠.
Q. 일반인들이 운동할 때 어떻게 뛰어야 일상생활에 지장이 안 갈까요?
A. 달리기를 처음 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걸어야 해요. 그냥 평상시에 걷는 것처럼 걷는게 아니라 팔을 90도 정도 굽혀서 빨리 걷기를 하는 거예요. 30분이든 40분이든 계속하다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달리고 싶어지게 돼요. 그때까지 참고 걷는 거예요. 그러면 부상을 안 당해요. 그런데 보통은 잘 뛰든 못 뛰든 그냥 뛰어요. 기본을 익히든지 또는 준비운동을 철저히 하고 달려야 하는데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달리기를 하니 부상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처음에는 무조건 걷는 거예요. 그리고 본인이 스스로 이젠 뛰어야 되겠다 생각이 들고 막 뛰고 싶어 하고 그런 의욕이 생길 때까지 걷는 거예요.
달리기 시작할 때부터는 계속 조깅만 하는 겁니다. 편하게 조깅하다 보면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 빨리 달리고 싶은 의욕이 막 생겨요. 사람의 욕심이 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생기게 돼 있어요. 그때부터 조금씩 속도를 늘려서 빨리 뛰는 거예요. 그리고 거리를 조금씩 늘려가는 거죠.
그러다 보면 본인도 모르게 빨리 뛰기도 하고 천천히 뛰는 등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예요. 국내 스포츠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평균 운동 수명이 7년이에요. 사실 부상 때문에 지속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이는 준비가 부족하고 기본을 지키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Q. 감독님의 앞으로의 목표는 뭔가요?
A. 제가 번 금액의 10%는 좋은 일에 써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내가 잘 사는 사람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아니지만 내가 그래도 어쨌든 국가대표도 하고 또 주변에서 도움도 많이 받아왔기에 내가 받은 만큼 나는 줘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어쨌든 저는 제가 번 수익의 일부는 좋은 곳에 써야 된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어요. 그러나 잘 안돼요. 일단 코로나 이후 벌이가 시원찮고 지금 당장 제가 먹고 살기 어려워지니 내 가족 먹고 살기에도 버거워, 당초 제가 생각하고 있던 봉사들을 쉽게 할 수 없게 되네요.
열심히 벌어서 또 열심히 또 봉사도 하고, 작은 나눔도 하고 그래서 위앤위드(we&with) 봉사단을 운영하는 거예요. 봉사단은 완전히 스포츠로 운영하는 거예요. 스포츠에서 수익이 생기면 기부를 하는 등 좋은 일에 사용하려고 합니다. 실제로 올봄에는 충주 성심학교에 2,000만 원가량 물품 기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행사를 하게 되면 그 수익에서 일부를 기부하려고도 하지만 요즘 참 힘듭니다.
대회에 참여해서 할 수도 있고 지금처럼 마라톤 교실을 운영 하면 수익에서 10%를 좋은 데 쓴다고 이미 공표했습니다.
Q. 기사를 보시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A. 제가 지금 운영하고 있는 마라톤교실의 제자들에게 항상 하는 얘기는 “간절해야 한다. 간절하고 절실해라. 그래야 꿈이 이루어진다”라는 겁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든지 아니면 대회에서 입상한다든지 등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정말 간절하고 절실하지 않으면 최선을 다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제 스스로 항상 물어봅니다. 차한식 너 아직 간절하지 않구나. 네가 절실하지 않고 간절하지 않기 때문에 네가 지금 놀고 있구나. 뭐든지 간절하고 절실하면 하게 돼 있어요. 근데 내가 지금 이렇게 안 하는 이유는 내가 아직도 간절하지 않기 때문에 안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힘든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절대 목표를 못 이룬다는 것을 항상 얘기합니다.
Q. 앞으로 세계대회에서 금메달이라는 목표를 가진 선수들에게 조언한다면?
A. 편하게 말해보겠습니다.(웃음) 죽도록 해라. 근데 우리나라 선수들은 죽도록 안 해요. 너무 배부르달까? 저는 있는 그대로 얘기하는 거예요. 배부른 돼지가 되지 마라. 진짜 죽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려면 죽도록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정말 간절하고 절실하게 될 때까지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 CEO저널(http://www.ceojh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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